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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review

서평) 고등어 소년은 어떻게 리틀보이가 되었는가



  조인호 시집, 방독면(문학동네, 2011)

 
아이는 무서웠다. 첫 번째 무서움은 어머니로부터. “만삭의 어머니가 생선을 굽던 비릿한 어느 저녁, 프라이팬 밖으로 튕겨오르던 기름방울처럼 지글지글 나는 태어났지 아기야,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어머니는 나무 도마에 흥건히 젖은 피를 닦으며 말하셨지 그날 이후로 나는 똑똑한 생선 한 마리”(「고등어 나르시시즘」). 고등어가 된 아이는 어머니와 유치원 선생님과 친구들과 첫사랑으로부터 조롱당하고 명령 받고 버림받고, “물 좋은 직장 하나 만나지 못하고 퀭한 생선 눈깔을 지닌 실업자”가 되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랩으로 포장된 고등어 한 마리로 태어나” “얘야, 어머니 같은 생선을 먹어야지 머리가 좋아진단다! 여전히 같은 말만 하”신다. 그러면 그는 “프라이팬 위로 도망치”고 “어머니는 (...) 지글지글 익어가는 나를 노려보며 내 깊은 잠을 깨운”다. 일어나 보면 다시 유치원에 갈 시간. 프라이팬 위에서 구워진 자기의 살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받아먹으며 아이는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로 시작하는 따뜻하고 애잔한 가요의 이면을, 도마 위에서 프라이팬 위로, 프라이팬 위에서 자기 앞의 식탁으로, 먹고 먹히는 자를 한꺼번에 연마한다. 이 끔찍한 카니발리즘을 수련하는 또다른 장면. “아가야, 저 머리통만한 당신의 입이 나를 부”르고, “내가 찻잔보다 둥근 요람 속에서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 때 / 어머니, 당신은 조용히 차를 홀짝이”거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울고 있”다. ‘나’와 무관한 어머니의 향유와 슬픔. 그 앞에서 그는 미안해지고, 미안해진 소년은 그만, 최초의 타인에게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빨조차 없는 빨간 아기”(「멜팅 포인트」)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무섭다. 어머니는 소년의 무력함을 일깨우고 그를 미안하게 만든다. 그 때문인지 아이는 여자 앞에서는 항상 도마 위에 있는 기분이다. “창문 너머 너는 칼로 도마 위를 / 내리친다 초인종이 울리고 축축한 나의 몸만이 / 절뚝거리며 들어와 도마 위로 가지런히 눕는다 (...) 이제 칼자루를 잡은 너의 손, (...) 도마 위 수북이 쌓여가는 장미 잎 붉은 무덤”(「장미의 요일」).

 두 번째 무서움은 아버지로부터. 그 무서움이 어떻게 “불가능”한 시 쓰기와 관련되어 있는지 그는 자서(自書)에 밝혀 놓았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느꼈던 기다림의 공포, “이 참혹하고 그 어떤 동정심도 없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시인이란 나에게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시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불가능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이 무서움은 명백하게, 아버지에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무자비한 시간으로부터 온다. 순식간에 한 인간을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장례식장은 그에게 “아우슈비츠의 대량학살”과 다름없이 여겨지고 문득 그에게는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정말 유태인이었나?”(「나의 투쟁-컨베이어벨트」)

 이 차가운 농담은 응축된 분노 에너지의 폭발을 예고하는 것 같다. 그가 시에서 사용하는 ‘나의 투쟁’, ‘악의 축’, ‘리틀보이’ 등의 정치적이고 극단적인 메타포들은 현실 정치 속의 파시즘, 북한이나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태도, 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원자폭탄의 세계사적 의미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의 내부의 열기는 증기처럼 그의 ‘힘’에 대한 상상을 가동시킨다. “어떤 사유도 증기처럼 혁명적일 수 없었고, 증기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그 무엇으로 상승했다.”(「불가사리 三-제국에서 보낸 한 철(鐵)」) 그의 짐짓 정치적인 어휘들은 실은 그의 세계에 실재하는 강력한 공포와 분노의 핵을 지칭하는, ‘힘’의 메타포이므로, 그가 멸망시키고 재구성한 ‘방독면’의 세계에서는 현실 정치가 손익계산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캄푸라치’--사회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 이 무서움들은 연민과 붙어 있다. 모성적 초자아의 세계는 고등어 소년으로 순순히 똑똑하게 자라야 한다는 명령으로 그의 죄책감과 무력함을 일으키고, 따라서 그는 여기에서만은 언제나 ‘빨간 아기’가 되며, 무자비한 세계의 희생자인 ‘털 깎인 양 같은 아버지’를 품고(「나와 나의 양(羊)」) 세계의 끝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동정심 없는’ 세상에 분노하며 그는 방독면, 철가면, 오함마, 낫과 망치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무장하는 동안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비행 소년이 탄생하는 시점이고, 무서운 아이들이 무서워지기 직전의 감정이다. 그렇게 해서 ‘무서운 사람’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무서워서 무서워진 사람’. 조인호의 ‘철가면’과 ‘방독면’은 처음에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외로운 사다키요의 가면처럼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발명되었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유독성을 표시하는 상징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극단의 공포와 분노를 느낀 자만 감당할 수 있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그는 자기의 제국을 건설한다. 그렇게 ‘리틀보이’는 탄생하고 대단위의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했던 것이다.

 나 리틀보이는 지하방에서 삽니다. (...) 나 리틀보이가 호주머니에 넣고 깜빡한 초콜릿처럼 흐물흐물 불에 탄 가족사진이 보입니다. (...) 나 리틀보이가 메기를 쪼물쪼물 만지작거릴수록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쑥쑥! (...) 빛보다 빠른 타임머신처럼 메기가 쑥쑥 자라납니다. 21세기 소년에서 20세기 소년에게로. 키가 쑥쑥! 자라는 메기에게. 나 리틀보이는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합니다. 나 리틀보이의 메기야, 안녕히 잘 가!

*

 나 리틀보이는 그때 죽었다.

 거대한 폭음과 빛과 태풍과 열과 함께.

-「리틀보이의 여름방학-21세기 소년에서 20세기 소년에게로」 부분.

 시집의 절반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철(鐵)의 세계’는 이 폭발 전후를 암시하고 있으며, 그 대단위의 종말론적 광경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도저한 부정 속에서 ‘철가면’이나 ‘방독면’의 수직적 상승과 숭고한 순교라는 이미지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리틀보이의 ‘메기’-남근 상징의 거대한 수직 상승과 폭발은, 이를테면 40여 년 전의 김수영이 「거대한 뿌리」에서 그린 뿌리-남근 상징의 수직 하강, 착근(着根)의 의지와 비교하면 ‘힘’의 확장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자기 위력의 (무)의식적인 목적의 상이성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역사화하고 각인시키는 대신 역사를 끝장내고자 하며, 어찌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어디에서나 눈에 띠도록 만방에 자기의  위협을 선포한다.

 불가능한 도미노 게임. ('도미노Domino'는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니, 이 게임은 창조주의 행위를 본뜬 것이리라.) 이 게임의 백미는 오랜 수고 끝에 세워진 하나의 세계가 손가락 하나의 간단한 힘의 촉발과 함께 구조물들 자신이 연쇄적으로 허물어지는, ‘질서 자체의 파괴력과 그 수행’을 목격하는 쾌락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1945년의 빨간 버튼’은 이 도미노 게임의 ‘마지막 촉지(觸肢)’의 설렘과 흥분을 담고 있지 않은가. 짓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는 망치처럼 그는 피비린내와도 같이 아린 쇳내를 풍기며 오늘도 이 수고를 자처한다. 자기를 거듭 추동시켜 증기기관처럼 폭발시키고 있다.

 울지 않기 위하여.

 무서운 아이는 울지 않으니까.

(<문학과 사회> 2011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