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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시인론

동지, 자네의 섬뜩한 농담은 내 손이 호주머니 속을 더듬게 해

그러니까, 우리가 장난이나 한번 쳐볼까, 하고 모였던 것은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나는 거의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방식으로 (아니, 운명을 가장한 우연의 방식인가?) 그와 함께 동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동인 활동이란 건 대체 무엇인가? 한 30년 전쯤이라면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학적인 대의명분이라도 있었겠지만, 시의 시대도 지나가고, 가시적인 적들의 적성(敵性)은 단물처럼 대기에 비가시적으로다가 녹아들고, 나름 교체된 정권도 한동안 살아보고, 지금은 상냥한 얼굴로 뒤통수를 쳐대는 교활한 적의 품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래서 결론적으로 온갖 고민들이 문화적인 형태로 세련되고 교양 있는 취미의 자원을 이루게 된 지금, 21세기 시작하고 한 10년 지난 다음에 축구단이나 야구단도 아니고 동호회도 아니고, 이미 글 쓰는 자들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글쓰기로 의기투합을 할 때에는, 뭐 그럴듯하게 보일만한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럴듯한 이유를 나는 댈 수가 없다. 그럴듯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모욕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외로웠다. 온갖 이유들을 다 생각해보아도 가장 큰 이유는 이 외로움이었다. 와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다가 쓰고 나니 쪽 팔리고 아프지만, 그랬다. 사람 새끼로 태어나 오롯이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궁굴리면서 죽을 때까지 사람 새끼로 산다는 일이 뭘 한다고 덜 외로워질까마는, 유독 고독을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일을 선택했을 때에는 어떤 식으로든 혼자 장난치는 일의 외로움을 공유할 동지들이 필요한 법이다. 뭐? 고독한 개별자? 창 없는 모나드? 각개격파? 아무리 멋들어진 말로 장식해봐야 지질한 외로움이 싹 가시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혼자 지랄하느니 여럿이서 지랄하자. 그러면 덜 쪽 팔릴지도 모른다. 이걸 연대라 하든 협력이라 하든, 분명한 건 이편이 조금 더 재미있다는 거다.


서효인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다 큰 짱구처럼 생겼는데, 웃을 때면 쌀집 아저씨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웃는 얼굴로 하는 얘기들에서 맘씨 좋은 쌀집 아저씨의 친절을 기대하면 오산이다. 그는 악동과 꼰대와 변태 사이를 간단히 오간다(산문, 「내게 시는 너무 써」). 모범생과 날라리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그는 대체 어떤 시점에 시를 쓰자고, 그러니까 가장 진지한 날라리가 되자고 결심하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