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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국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 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
실비아 수수께끼 실비아 수수께끼 이진희 실비아 실비아이기도 하고 실비아가 아니기도 한 모든 실비아 혹은 어떤 특별한 실비아 이기적이고 싶은 실비아 착하구나 장하다 칭찬받고 싶은 실비아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실비아 그래서 자신을 어느 날은 소녀라고 어느 날은 소년이라고 틀림없이 믿는 실비아 어느 날은 아무 것도 아닌 먼지였다가 쓰레기였다가 어느 날은 전능하기 짝이 없는 실비아가 되고 싶은 실비아 죽도록 살고 싶은 실비아 그래서 사는 게 헌신짝 같은 실비아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하는 아름다운 실비아 새카맣게 응혈진 피의 매듭*을 끊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고민을 커피처럼 즐기는 실비아 시를 쓰고 싶지만 훌륭한 시를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시를 쓰지 못하는 실비아 쓰고 싶은 시가 어떤 건지 모르는 실비아 다만 쪼글쪼글 늙어가..
유토피아에서 아나키로 기획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시인에게 시 쓰기 자체가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개성이 다양한 만큼 실천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 이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를 여러 평론가와 시인의 시각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기획의도에 대한 나의 해석이 이 글의 성격을 규정지을 것이었다. 1. ‘실천’은 무슨 뜻인가? 2. 1.의 의미와 관련하여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2의 ‘다양한 시 쓰기로서의 실천’이 성립 가능한 구문이라면, 그것이 ‘시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가능한가? ‘왜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지’라는 의문은 타당한..
세계를 늘릴 것인가, '나'를 늘일 것인가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증식하는 유령들; 최승호, 아메바(문학동네, 2011) 등단 이후 꾸준히 독창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최승호의 이번 시집은 자기 자신의 말들로부터 뻗어나간 실뿌리 같은 상상의 편린들을 그 원천들과 함께 수록하고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인터뷰들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충분한 기획 의도를 가지고 수행된 것으로, 이번 시집의 출간이 시인 자신에게는 등단 이후 30여 년간의 자신의 詩作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실험’이며 ‘일종의 문체연습’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연습은 ‘완성된 한 편의 시’라는 관념을 잠시 괄호 속에 넣고 ..
최승호, "02 해체되기 위하여" 아메바(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최승호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02 해체되기 위하여 해체되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 중에서 게여, 네가 가장 잘생겼다 02-1 먹히기 위하여 태어난 존재 중에서 멍게여, 네가 가장 멍청해 보인다 02-2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 우리는 어기적거리며 등심을 먹기 시작한다 썰어 먹고 잘라 먹고 베어 먹고 씹어 먹고 다시 왼손엔 나이프, 오른손엔 포크 02-3 해체된 찌꺼기들의 반죽덩어리 똥! 똥 속에 자식을 키우는 아프리카 쇠똥구리 부부는 금슬이 좋다 02-4 멍게여, 솔직히 너희들이 왜 사는지 모르겠다
송재학, "머린호르[馬頭琴]와 낙타가 우는 밤" 내간체를얻다(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송재학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머린호르[馬頭琴]와 낙타가 우는 밤 나랑톨 시장에서 노인이 산 마두금의 말머리 장식은 조잡했지만 새끼 잃은 어미 낙타의 울음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노인은 두 개의 현을 누르고 활을 켜보았다 무겁고 두꺼운 음과 찰랑거리는 음이 고오하게 섞이거나 기이하게 솟아오른다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곧 마두금의 밤이다 열 살짜리 나라까의 무덤에도 새끼 낙타가 희생되었다 매년 초원에서 나라까의 무덤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어미 낙타를 데리고 가야 했다 새끼를 기억하는 어미 낙타와 마두금이 우는 곳, 그곳이 나라까를 위해 새끼 낙타가 죽은 곳이다 나라까의 무덤이다 낙타와 나라까 사이에 마두금이 있다면 ..
김언희, "벡사시옹(Vexations)" 요즘우울하십니까(일반판)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김언희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벡사시옹(Vexations) 1 밥상 위의 파리가 엉겁결에 밥상 위의 파리가 되고 만 것처럼 金 역시 엉겁결에 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엉겁결에 2 아무도 金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金은 숨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3 목을 맬 때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金이 물었을 것이다 별생각 없을 거야, 金이 대답했을 것이다 4 金이 입을 열자마자 金은 귀머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귀를 기울이자마자 金은 벙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金이 金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황홀경이었을 것이다 5 늘 웃을 곳이 아닌 데서 웃었을 것이다 金은 울 곳이 아닌 데서 울었을 것이다 金의 웃..
이준규, "검은머리방울새" 토마토가익어가는계절 카테고리 시/에세이 > 장르시 > 현대시 지은이 이준규 (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세보기 검은머리방울새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살았다. 이 문장은 무한히 반복해도 좋으리라. 그러니까 검은머리방울새는 오리나무숲에 산다. 검은머리방울새는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는 방울새나 촉새처럼 또륵또륵또륵또르륵또르르륵 울거나 찌리찌찌리찌찌쪼찌리찌 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검은머리방울새는 그냥 쮸잉쮸잉쭈잇쭈잇 울었다. 검은머리방울새가 현실에서 어떤 울음을 운다면 그것은 꿈을 꿀 때뿐이기 때문이다. 검은머리방울새가 침묵할 때는 다른 모든 새들이 침묵할 때와 동일한 침묵을 침묵한다. 침묵을 침묵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은머리방울새는 어느 날 문득 아무것도 아무것과 구분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