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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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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외대 번역 워크샵 강연문 초청해주신 정기인 선생님과 제 시집을 선택하고 읽어주신 동경외대 조선어학과 학생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질문을 전해 받고 생각한 바를 적어보았습니다. 1. 시, 시인, 시 쓰기, 시와 사회 최초로 쓴 시가 어떤 시인지, 그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적 장래희망은 사립탐정이었습니다. 여덟 살 때 모리스 르블랑의 을 읽은 후부터였지요. 저는 늘 비밀에 관심이 많았고, 수수께끼에 매료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실망했습니다. 열한 살 때 처음 숙제로 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학교에서 배운 ‘시라고 생각되는 것’을 의식하고 쓴 것이었을 따름입니다. 자발적인 내적 욕망으로 처음 시를 썼던 것은 열두 살 무렵이었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
매다 꽂기 첫 시집을 냈을 때 내가 전해들은 내 시에 대한 한 선배 시인의 반응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정한아 시는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마치 남자 시인의 시를 읽는 것 같아. 남자 시인과 여자 시인의 시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크게 놀랐지만 가벼운 자리였기 때문에 그저 농담을 하는 것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 마음속에 아저씨가 한 명 살고 있나 봐요.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내 마음속에 살고 있는 그 아저씨는 이제까지 내가 사랑하며 읽어온 고전들의 저자가 주로 백인 중년 남성들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이나 같은 고전적인 복수극도, 셜록 홈즈 시리즈나 같은 추리소설도, 10대 시절에 푹 빠져 지냈던 실존주의 작품이나 누보 로망도 대부분 백인 아저씨들이 쓴 것이었다..
그가 아직 평론가가 아니었을 때 아, 이런 글을 내게 맡기다니 반칙이다. 시인의 커버스토리라면 시를 인용할 수 있었겠지. 시를 인용한다면 10-20매는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평론가의 커버스토리라니. 게다가 강석이 형은 너무 친한 선배라 어디까지 써도 좋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형의 책들을 죄다 읽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형의 논문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또 며칠이 가고, 원고청탁서에 쓰인 대로 어린 시절과 문청시절을 취재해볼까, 하다가 며칠이 가고, 그렇게 마감일을 두 번이나 넘기고서야 빈문서 앞에 앉는다. 아무래도 나는 평론가 조강석에 관해서는 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연구자 조강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벌써 오랜 시간 평론과 논문에서 이미지론을 심화해온 터라 그 내용을 어설프게 해설해봤자 그의 평론 한 편을 지긋이 읽..
벌레의 눈과 새의 눈 16세에 학교를 뛰쳐나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대영박물관에서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독특한 사상을 펼친 콜린 윌슨은 제도화된 학문분과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이른바 ‘B급 관심사’들을 진지한 학문적 주제와 더불어 고찰하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는 인류의 범죄사를 서술한 『잔혹』이라는 책에서 줄리언 제인스의 ‘분리 뇌’에 관해 논하고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현생 인류의 대뇌는 우반구와 좌반구로 분리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두툼한 뇌량이 연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적 사고를, 우뇌는 직감과 패턴의 인식을 담당한다. 간단히 말해 좌뇌는 과학자, 우뇌는 예술가이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오래된 우리의 선조는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 지극히 작거나 없어서 두 개의 뇌가 동시..
기찻간 변사사건 관련 진술서(<사랑손님과 어머니> 이어쓰기) 박옥희의 외삼촌 천덕구의 진술서 나는 금년 열다섯 살 된 중학생 천덕구입니다. 나는 박옥희의 작은외삼촌이고 천명희의 남동생입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집에서 멀쩡한 것은 나뿐이지 싶습니다. 다른 순사분이 옥희의 진술서를 읽어주셨습니다. 아주 순진하게 썼더군요, 마는 고 앙큼한 것은 눈치가 백단이란 말입니다. 옥희는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물론 어린 계집애 말을 다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저를 왜 부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뭘 속이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는 바에 관해서는 모두 숨김없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랑채서 지내던 그치가 왜 기찻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랑 한 방을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치가 누이랑 사랑놀음하느라 편지를 쓰네, 시를 쓰네, 등잔불 밑에서..
그 말은 움직일 수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안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들도 가장 고결한 신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문명 속의 불만」(1930) * 작년 겨울, 계절 학기 수업 보고서에서 읽은 문장 몇 개가 잊히지 않는다. 광장에서는 한창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수업이 진행되던 중에 헌재에서는 탄핵 심판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3주 동안 평일 겨울 오후의 강의실에서 몇 권의 시집과 몇 편의 단편 소설, 또 몇 편의 에세이를 함께 읽었고, 이 세미나에 가까운 수업은 최근 몇 년 간의 사회적 사건들을 화제에 올리며 종종 격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내가 지나온 20대와는 완연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20대의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홉스봄의 말대로 과..
굿모닝, 수북 씨 어? 수국이 수북수북 피었네? 라고 한 것은 남편의 말. 농업 시험장에서 일하시면서 온갖 종류의 식물을 키우셨다는 할아버지 때문인지,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 식물 키우기를 좋아했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가 35년 전에 대리인지 차장인지 승진하실 때 동료들이 가져온 군자란이 아직도 해마다 꽃을 피우고 함께 들어온 소철은 사람 키를 넘어간다. 분갈이도 안 해주는데 그 피우기 어렵다는 군자란 꽃이 어떻게 한 해도 안 빼먹고 피는지는 수수께끼. 언젠가 아버지가 베란다에 가득한 화분들에 너무 골몰하시는 걸 보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아빠는 왜 말 없는 것들만 좋아해? 아버지는 슬픈 표정인지 서러운 표정인지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도 말을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가족력 때문인지 동생도 식물을 키운..
출국장에서: 작란(作亂) 트리뷰트 도깨비장난 (...)작란(作亂)이라는 동인에 가담해서 장난을 치고 다닌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건 적법한 행위입니다. 왜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작란은 예전부터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 장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었습니까? 다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돌보겠습니다. 장난에도 수위가 있는 걸 모르십니까? 소꿉장난, 흙장난, 불장난, 도깨비장난…… 도깨비장난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밑줄을 그을 단어가 나온 것 같습니다.(...) -오은, 「청문회」(『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작란 말고는 동인을 모른다. 물론 문학사 책에 나오는 동인들과 동시대를 사는 다른 동인들이 있다는 사실, 그들의 이름, 그들에 속한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