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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t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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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공포 1. 초월적 상상력의 부정적 총체성으로 얼룩진 ‘세계의 밤’을 지나 ‘우리-없는-세계’의 ‘존재-없는-생명’의 공포에 도달한다. 또는 충동의 가없는 질주를 지나 매끄럽게 균질화된 권태로운 기분의 세계에 도착한다. 아무튼 저 세계의 밤은 충동과 부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이 ‘우리-없는-세계’, 또는 균질화된 권태 속을 미끄러져 가는 지금-여기의 시공간은 가장 작은 요철도 무덤처럼 불룩한 충격을 안겨주는 곳이다. 어쩌면 낭만주의 다음에 고전주의가 오는 것처럼, 혹은 패션 유행의 30년 주기설처럼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세대는 복고를 새것으로 겪는 것일지도. 그러나 과거와 꼭 같이 반복되지 않으므로, 복고가 되기 전의 그것을 겪은 사람은 거부감을 표시할지도. 그러고 보면 이즈음의 시는 어떤 면..
20세기의 연기 속에서 시인 겸 철학자 유진 새커의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 철학의 공포』에서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문화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연구와 적극적으로 혼합하려고 한다. 그는 고딕 소설과 공포 문학, 20세기와 최근의 공포 영화와 재난 영화에서 재현하고 있는 공포의 대상들을 유형화하고 이를 자기 자신과의 토론을 통해 이론화하면서 느슨한 시적 이론을 펼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실체가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익명적 공포에 관한 담론으로 이것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 근거로, 그는 고전적인 괴수 영화들(좀비, 흡혈귀, 악마, 유령 영화들)과 대별되는 ‘거기 있음’의 공포를 제시한다. 가령, , , , , , , , , 등의, 이름을 확정지을 수 없는 공포의 대상들에 관한 영화 제목들을 예로 들면서, 이런 ‘새로운’ 종류의 공..
어떻게 죄책감 없이 감자를 토막 낼 수 있는지에 관하여 응달에 둔 감자가 서서히 퍼렇게 질리고 있다 구워 먹고 삶아 먹고 튀겨 먹고 볶아 먹고 밥에 넣고 국에 넣고 갈아서 부쳐 먹고 삶아서 으깨 먹고 그러고도 남아서 응달에 펼쳐둔 감자 아, 재밌어. 다음번 생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다른 많은 감자와 함께 상자에 실려 우리 집에 온 저 감자가 다음 생에 사람이 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끔찍한 말을 하는 능력을 지닐 수도 그런 능력에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응급상황 시 아이들을 먼저 구조해주세요” 라고 차 뒷유리에 스티커를 버젓이 붙여놓고 좆같이 운전하는 새끼들은 끝까지 쫓아가서 박아버리고 싶어 라거나 죄를 용서받고 싶거들랑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라거나 나를 찌르고 싶..
오인된 적자생존과 헐값의, 위험한 자유 외과 의사이자 생물학자였으며, 훗날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라는 서늘한 새타이어로 가득 찬 디스토피아 소설의 작가로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머스 헉슬리는 1888년, 「인간사회에서의 생존경쟁」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매끄러운 필치로 이제 유럽 세계의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자연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우리가 이상사회로 가는 어떤 단계에 속해 있든 “모든 현존 가능한 세상을 놓고 볼 때 지금의 세상이 최고가 아니라 해도, 지금이 최악이라는 말은 그저 별난 사람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제한 없이 증가하고 번식하는 한 평화와 산업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전쟁 체제와 다름없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따..
어차피즘 연구를 위한 메모 1. 어차피 씨는 누구인가 어차피 씨가 언제부터 어차피 씨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만취하고 나머지 3, 4일은 숙취를 벗어나느라 바빴던 젊은 시절에 그는 소위 X세대라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비슷한 시기 신세대나 오렌지족도 있었지만 신세대는 뭔가 뒤쳐진 낱말 같았고 오렌지족은 계급적으로 한정되어 위화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X세대라 불리는 편을 선호했던 것 같다. 어차피 세대에 대한 명명은 윗세대 사람들의 일이니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겠지만, 나이 들고 보니 그나마 X세대가 가장 중립적인 명칭으로 여겨졌던 듯 싶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졸업할 때쯤 IMF 사태를 맞닥뜨린 사람. 친구들 중에는 선배들이 차린 IT 벤처 기업에서 일하다 거..
그저 인간이 되는 것만도: 알베르 카뮈,『페스트』 * 참고한 판본은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책세상, 1992(1947))이다.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벗고 나서지요?” “나도 모르죠. 아마 나의 윤리관 때문인가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초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유망주로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알베르 카뮈는 흔히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대표적인 실존주의 작가로 불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방인』의 심드렁한 주인공 뫼르소는 세계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욕망과 동경과 활기를 잃어버린, 오직 우연한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는 방랑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내내 유럽은 신이 죽어버렸거나, 혹 존재한다손..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는 작가선언보다 백수선언이 어울릴 것 같은데 - 6.9 작가선언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 정말이지, 나는 이 원고의 청탁을 왜 덥석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처음 6.9 작가선언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잠시 망설이다가 쓰기로 한 것은 어떤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나는 사실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 참석하기는 했었다. 처음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이 강압적인 검찰 수사 끝에 투신하고 며칠 뒤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우선 모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전화를 받았다. 두 민주계 대통령의 집권 10년을 거치면..
일어권 독자를 만나는 마음 오래 전 캐나다에서의 일입니다. 유키와 저는 짧은 영어로 대화하면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유키는 한국어를 못했지요. 영어 학교의 짧은 학기가 끝나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그곳 엽서를 저에게 보내주었는데 워싱턴 시에서 보낸 엽서에는 빌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의 사진에 “Buy 1 & Get 1 Free!”라는 재미있는 문구가 쓰여 있었어요. 그녀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답장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끔 시가, 우리 사이에 오가던 비문투성이 영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것은 문법이 엉망이지만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웠을 거예요. 우리가 설령 서로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고 해도요. 오래 전 엽서들에 뒤늦게 답장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