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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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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독 밖으로 나오는 바구미 급하더라도, 대강 하지 말자. 너무 빨리 읽으면 사상은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은 사상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의 말들로는 그렇고 그런 상식 수준의 생각들 말고는 만들어낼 수 없다. 아니, 그것은 만들어진 것조차도 아니며 재활용되지 못한 재활용품 수거함 속의 냄새나는 빈 페트병 같은 것밖에는 안 된다. 그것을 가공하여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깊은 성찰과 사상이다.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재료를 추출해내기라도 해야 한다. 위로가 되는 것은 내 말을 알아듣는 벗과 좋은 책이고, 이들과 대화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나는 내가 감히 인류의 벗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사는 현실의 세계에서 나와 어깨를 부딛치는 것은 '인류'가 아니라 무수한..
아저씨는 파업 중 며칠 전 연구실을 나서던 밤 11시, 파업 중인 외솔관 경비 아저씨가 6층 연구실 옆 계단 복도에 놓인 쓰레기통을 가만히 치우고 계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을 이 아저씨가 "아이구, 오늘 나오셨어요?" 하는 동시에 나는 "아니, 오늘 나오셨네요?" 하고 둘이 웃고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아, 아저씨는 왜 이 무임금의 밤에 나오셔서 '살짝이 아무도 모르게' 쓰레기통을 치우고 계시는 건가, 가슴이 아프다. 그러고 보니 청소/경비 노조 파업이 보름이 넘어갔는데 학교에 나와 보면 넘치는 휴지통 하나 없다. 이래서야 파업이 파업답게 될 수 있을까...하다가 아저씨의 집이나 다름없을 외솔관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그의 저임금-무임금의 밤 시간을 생각하고, 이러한데, 나란 놈은 공부..
기도합니다 http://viamedia.tistory.com/trackback/398 일본성공회 토호쿠교구 주교의 메일 3월 13일 20시 38분에 지진 재해지역인 토호쿠교구 카토 히로미치 주교님이 일본 각교구 주교님과 성직자에게 보낸 메일입니다. 한일협동위원회를 통해 전송되어 왔기에 급히 옮겨 전합니다. - 관구 한일협동위원회 유시경 신부 주교회, 그리고 지금까지 메일로 연락주신 여러분들께 오늘 밤 겨우 집에 전기가 들어와, 이 컴퓨터로 메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일을 열어보니 정말 많은 격려 메일이 와 있었고, 캔터베리 대주교님을 위시하여 해외로부터 많은 메시지를 주셔서 지금 처음 보면서 정말 놀랐고 감사를 드립니다. 수도는 아직 개통되지 않았지만, 어젯밤까지는 컴컴해서 몹시 추웠습니다. 어떤 분이 주신..
자살과 서거, 혹은 과연 부엉이는 쥐의 포식자인가?-양심도 라디오처럼 끄고 켤 수 있다면 하얀 부엉이 누굴까? 하얀 부엉이가 우리에게 묻고 있어. 누굴까? 이건 부엉이가 낸 수수께끼야. 하얀 세상에 하얀 깃을 가진 건 누굴까? 하얀 얼음 위로 나는 건 누굴까? 누굴까? 또, 하얀 눈 위로 나는 건 누굴까? 하얀 바람이 불 때 훨훨 나는 건 누굴까? - "노란 코끼리" 중에서 하여간 그날 저녁 수위는 헛소리를 해댔고 열이 40도나 오르는 가운데 쥐를 원망하고 있었다..."아! 이 망할 것들 때문에!" ... "쥐들!" 하고 그는 내뱉었다. ... "이제 그럼 가망이 없는 건가요, 선생님?" "죽었습니다." 하고 리유가 말했다. ... 공포가, 그리고 공포와 함께 반성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카뮈, "페스트" 어제 아침 노무현이 자살했다. 뉴스에서는 한사코 ‘서거했다’고 한다. 작..
휴강의 18세기적인 변명 그래, 난 오늘 휴강한다. 며칠, 휴식이 필요했다. 몸은 해면처럼 가라앉고 하느님은 해파리처럼 내 멍한 정신의 수면 가장자리를 배회하고 계신다. 3주째를 지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좌에서 80명의 자활센터 회원들과 그랑빌을, 김애란을, 함성호와 고영을 읽으면서 대학생들과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문학의 본질과 기능을 완전히 일상적인 언어로 함께 사유하면서 어떤 가능성들을 발견하고 있다.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않겠다. 그들의 핵심 요약과 작품에 대한 견해는 온전히 경험적인 삶으로부터 도출되었으되, 훌륭한 관념론과 훌륭한 경험론이 그렇듯, 중요한 논점들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세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곰팡이 핀 엉덩이로부터 흘러나온 냄새나는 개념들을 완전히 폄하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학문이 충분히 ..
충혈된 눈 - 이상섭 선생의 "영미비평사"는 이상하게도, 쉬운 단어와 단순한 문장 구성인데도 주의집중이 안 되고 난삽한 느낌을 준다. 군데군데 미주에 영문 원 텍스트를 참조해놓고 있는데, 거기에 산재한 오탈자도 신빙성을 감하는 데 한몫 하고 있다. 오후에 좀 늦게 나가기는 했으나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이 책을 읽으며 화가 난 어제. 컨디션 때문인가. 오후에 연구실에 들렀던 ㅊㅁ 형도 '머리에 진한 구름 한 조각이 들어 있다'더니, 날씨 때문이었을까. 글자들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단어들은 낱낱이 흩어져 문장이 되지 않는다. - 만일 도덕과 행복 중 하나를 필연적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 고봉준의 '감동의 문학'과 '영감의 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일견 일리가 있으나, 이 '감동'은 보편적/긍정적 의미에서..
지금 서울에는 비가-to mistymay 지난 포스트에 비엔나 소년 합창단의 "o come, o come, Emmanuel"을 걸어 두었는데, 올리자마자 저작권 침해가 의심된다며 티스토리에서 위협적인 경고문을 달아놓았어. 나에게밖에는 들리지 않아. 나에게밖에는 들리지 않아. 어쨌든 나에게는 정말로 들려. 이걸 두 번 강조하는 순간 나는 '내 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주장한 아홉시 뉴스데스크 난동자의 위치에 서게 되겠지만, 이 들리지 않는 음악을 아무와도 나눌 수 없구나. 한때는 아무와도 나눌 수 없으니까 그 황홀경만은 내 것이라고 환호한 적도 있었지. mistymay, 어차피 좋아하는 음악을 똑같이 좋아할 순 없는 거라고 18년쯤 전에 너는 말했었지만, 네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게 새로 열린 세계를 구성하고 있..
어딘가 수상쩍은 오리너구리의 신앙생활 성공회 주교좌 대성당 지하성전의 스테인드글라스. 지하성전이라고는 해도, 나즈막한 비탈의 아랫부분이라 역시 지상이긴 하다. 7년 만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성당에는 아는 신부님들이 한 분도 없다. 울산 성당에서 내게 신명을 주시고 이 성당 성십자가 수녀원에 계시던 애그니스 수녀님도 몇 년 전 돌아가시고, 아직 겨울, 하느님은 추운 돌집에서 주무신다. 여기서는 가끔 "곧 오소서 임마누엘" 같은 12세기의 노래를 부르는데, 어릴 적 무척 좋아했던 노래다. 아직 오지 않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이집트 식민지 이스라엘의 정서를 반영한다. 예수는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 걸까. 죽고 살아나 돌아간 예수를 또 기다린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희귀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 건물은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