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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시신(詩神-屍身)의 뜬 눈

7월 14일의 일기.

1. 시 쓰기의 숨겨진 목표는 (시인에게까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 목표는) 시를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그것을 "이제까지의 시를 폐기하는 것"이며, 잠정적으로는 자기의 갱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시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는 시(자기의 온몸인, 시 쓰기의 순간에만큼은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혼신인)-로서의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를 죽이려 하는 것일까? 지금 당장의 시를 죽임으로써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2. 시를 죽이는 시 쓰기는 죽지 않는다. 

자동기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을 욕망의 기계로 이해한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관점을 부각시켜 이어받은 들뢰즈의 인간 이해가 중대한 사실을, 하나의 예리한 직관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글쓰기는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경우, 지루하고 매력이 없지만, 그 자신이 암시하고 있는 '기계적 특성'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그 자신의 글쓰기는 그가 하려는 말을 수행한다. 인간은 기계이며, 특이하게도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기계일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그가 언어를 죽임으로써, 그 언어에 체화되어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 녹아 있는, 자기 자신을 (기계적으로)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의지, 그 강도를 주체가 조절할 수 없는 욕망, 무의식적인 반복,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몰입, ... 이것은 욕망의 자동성이며 동시에, 주체의 관리를 벗어난 그 자체의 기계적 움직임이 아닌가?

3. 거기에는 모종의 무도덕amorality이 있다. 아니, 확연한 무차별성은 사드적인 도착의 영역과 실질적인 자기 파괴의 지대에 쉽게 친근해진다. 사드의 소설들은 말 그대로 말로 사람을 죽인다. 무차별적인 죽음은 규모와 강도와 속도를 점점 더 확장, 심화, 가속시킨다. 그의 텍스트는 감각적 관능의 만족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시 쓰기에서의 윤리란, 단지 이 갱신의 무차별적 욕망을 밀고 나간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어도 좋은가? 그 모든 엄청난 규모의 '죽이기'가 가장 장대한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 조각 난 말들의 잔해는 사위를 뒤덮고, 남아 있는 것은 무의미가 되어버린 의미의 시체들일 때, 하나의 종말을 향한 글쓰기의 욕망이, 과연 '윤리'라는 말로 정당화되어도 좋은 것일까?

가령, 시와 상관 없이, 바디우가 욕망의 자동성을 죄로 규정했을 때, 시와 정치와 사랑과 과학을 구별하려는 그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에서 모터처럼 작동하고 있는 욕망 그 자체, 무의식 그 자체, 어쩌면 생명 그 자체의 무차별적 메커니즘은, 시와 정치와 사랑과 과학 모두를 그 핵심에서부터, 그들의 공정을 진행하는 생산 라인 그 자체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시에 있어서는 진리인 '이제까지의 X를 죽이기'가 그 '죽이기'라는 행위 자체의 자동성에 대해서는 윤리적 의미를 부여 받는 것일까? 가령, 바디우의 절친한 친구인 지젝이 보여주는 글쓰기의 강박성, 그 자체가 하나의 자동성이면서, 그 내용이 자동적이고 습관적인 행위의 중지를 암시하고 있을 때, 그리고 바디우 자신의, 욕망의 자동성-죄를 중지할 행위의 요청이 또한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있을 때, 그리고 이것이 아직도 때때로 새삼스러운 각성을 준다면, 우리는 도덕 그 자체가 자동성을 중지하라는 요구의 기계적 지속이라는, 즉 도덕 자체가 강박증이라는 것을 아직 덜 깨달은 것이 아닐까?

라캉이 사드와 칸트를 함께 읽으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일까? 그러므로, 어쩌면, 이와 같은 잠정적인 결론 앞에서 우리는,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에 다시금 마주치는 것이 아닐까? 도덕법칙과 사디즘의 형식적인 일치가 의미하는 것은, 한 쪽의 다른 쪽으로의 개념적인 합병이 아니라, 내용만이, 혹은 목적과 동기만이 유일한 구분점이며, 우리가 숙고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다.

4. 물론 이와 같은 개념적 숙고에 따른 결론이 범박하기 그지없는 문학의 편내용주의와는 구별된다는 점을 노파심에 부기하도록 하자. 지난날로부터 우리가 배운 소위 '리얼리즘'의 편내용주의는 전통적인 형식을 고수하려는, 실은 매우 보수적인 욕망을 고수하며, '지난날의 감동을 되살리는 일', 다시 말해 노스탤지어와 가상적인 과거의 환희에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반동적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법칙이다. 즉, 칸트의 황금률은 여러 소문과는 달리 형식적 무차별성과 동시에 동기(motif, 음악에서 그것이 의미하듯이 주제와 내용 그 자체인)의 방향을 정위하고 있다. 사드의 소설들이 비록 형식적인 면에서 칸트를 패러디하고, 결과적으로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이 동기 자체에 대한 명백한 반대 입장은 어째서 미학적 분리주의가 지적으로 불충분한지를 보여준다. 실질적인 지적 능력은 수학적 이성의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관계에 대한 이해 능력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이성 능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단두대가 있는 꿈의 여인의 집'에 관한 칸트의 사례가 진정으로 의미한 것은, 라캉이나 지젝의 해석과 달리, 처벌이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도덕주의자는 처벌의 가시화된 구체성과 '관련없이' 법칙을 선택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병리적인(pathological) 계산이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이 사례를 굳이 자기 논증 안에 삽입한 것은, 파스칼이 '도박으로서의 신앙'을 이야기할 때처럼, 교육적 배려의 차원이었다. 즉, 만일 도덕법칙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 일반의 실질적 본성으로서 현실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 현실적인 이해타산만이 삶의 실천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라면, 처벌의 암시가 법칙의 강제성을 대신할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단지 도덕을 비웃는' 미학의 궁지는, 그것이 '이제까지의 시를 죽였으되' 자기 자신까지 죽여버린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단두대를 보고도(혹은 단두대를 보았기 때문에) 그녀를 품으러 문 안으로 돌진하는 금기 위반에 중독된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콜린 윌슨이 잔혹의 머릿말에 적시해놓은 것처럼, 인간의 위대한 창조성은 늘 그 승계자에 의해 진화하는 것과 반대로, 범죄자들은 후계자를 두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시를 죽이고도'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없는 시, 그 지속적인 죽이기를 죽여버리는 시, 동기를 잃어버린 자동성은, 범죄자처럼, 아무리 희대의 유명세를 얻는다 해도, 자기 자신이 죽은 후에는 결코 승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화하지 않는다. 그것이 '위대한 정신'--동기의 위대성을 가진 정신--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며, 인류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죽이기를 위한 죽이기는 한 번만 산다. 단지 금기 파괴를 위한 금기 파괴는 실제로는 금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다. 

5. '위대한 동기'의 첨단, 가장 고귀한 엑기스를 서양 철학은 '신', '신성', 또는 '신성성'이라고 불러왔던 것 같다. 신이 죽었다는 말은 따라서, 종교가 약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정신적인 진화의 동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무차별적인 '이제까지의 X 죽이기'가 아무런 동기나 목적, 내용을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대해 별로 유감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감이나 암시, 과장으로 이 말을 외화했던 니체의 '전면적인 가치의 재평가'를 탈현대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묻지마 범죄와 같은 방향으로, 즉 동기를 무화하는 방향으로 해석해왔다. 그들이 오해했던 '신 없는 세계의 자유의지'는 왜 통째로 '신 없는 세계의 비참'을 일컫는, 하나의 거대한 범죄 현장, 소돔 성의 마지막 풍경의 미화가 되어버렸나. 

6. 다행인 것은, 범죄자들이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생은 한번뿐이라는 사실(무도덕의 경계에서 실존주의자들이 개별자의 유한성에 집착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와 반대로 가장 높은 동기에 대한 추구는 자신의 승계자들을 통해 영원성을 실제로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핵심이 미래를 향한 현실적 잠재성의 기투이며, 그것이 실제로 현실태로의 변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한성에 사로잡힌 자는, 그가 원한을 연료로 삼는 한, 그저 유한할 뿐이다. 그의 도전은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진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영원과 불멸을 믿는 자, 더불어 자기 자신의 유한성으로 겸손해지는 자는 그 믿음을 힘껏 성장시킨 상태에서 자신의 계승자에게 물려준다. 그렇게 해서 영원성은 실제로 불멸한다. 개체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다는 개념이 영원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종적인 낙관론의 최소한의 형식이다.

7. 이제까지의 X를 올바른 법칙 속에서 죽이고 있는 X는, 결코 죽지 않는다. 

8. 법칙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는 한, 법칙은 죽지 않는다. 신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는 한, 신은 죽지 않는다. 그것이 그 개념의 본질이다. 

9. 동기 없는 자동기계는 한번만 사는 대신, 점점 더 많이 태어나고 있는 것 같다. 좀비 영화와 시리즈의 세계 점령은 이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최근의 콘텐츠들에서 좀비들은 자기들 나름의 동기-목적-내용을 계발하기 시작했는데(<나는 전설이다>, <웜 바디>, <Z-네이션> 등에서 감정의 발생, 숭배하려는 경향, 리더십의 탄생, 사랑과 연민의 가능성 등을 통해 조짐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인류학적인 되풀이처럼 보인다. 그건 더 거대한 비관론을 암시하는 건가? 우리 종 자체가 과거의 인류에 대해서는 좀비라는 비관적인 시각을 말이다. 헤겔은, (필경 자기 세대) 이후의 인간들은 머리가 없는, 역사가 없는 인간--동물이나 속물, 즉 욕구만 남은 머저리이거나 머저리를 비웃는 데에만 열중인 속 빈 강정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대한 비관론적 시각에서 세계는, '개, 돼지인 인간-동물들'과 '나 말고 다 개, 돼지라고 생각하는 속물'로 이루어진다. 속물들은 늘,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있다.)

0. 그러나 다시 한 번, 법칙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는 한, 법칙은 죽지 않는다. 기꺼이 중세를 기억하는 근대주의자처럼, 기꺼이 중세를 기억하는 근대를 또한 기꺼이 기억하는 후기근대의 인간이 예비되어야 한다. 망각은 있었던 사태를 없애지 않는다. 망각은 있었던 사태의 효과이다. 완전한 망각은 미망이다. 어떤 강박은 견뎌져야 한다. 

1/2. 성찰과 퇴행을 혼동하는, 늘 새것을 추구하므로 자신들은 언제나 새것이라고 착각하는, 유행의 지긋지긋함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자들에게는 '오래된 새것인 고전'을 통한 '새것 신드롬' 치료를 (알아채지 못하게) 우회적으로 권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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